사회과학 등에 학문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전혀 무관한 내 자신이지만, 우매한 눈으로 색안경을 끼고 나 몰라라 살아오진 않았다. 도올의 글처럼 궁극적인 행동을 많이 실천하지 않았지만 나름 난 내 길을 택했고, 그러한 의미에서 내가 속했던 집단에서 내 지성과 양심이 고사당하기 전에 빠져나왔다. 양심과 반성도 없이 나를 호위호식하게 만들어 버릴 곳, 내 선택이었지만 개인적인 선택만으로도 비판받아야할 곳이다. (일견 사회전문지식 집단의 위상이 이러한 수준이다. 상아탑을 위시하여 호위호식하면서 사회구조 및 관점에 대한 솔직함은 술한잔거리도 안되는 곳) 물론 나또한 마찬가지 이고.
오늘 한겨례, 도올의 발언을 읽었다. 적어도 내 눈으로는 당연함이다.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고, 비판하고, 동조하는 타인 입장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다양하다 못해 극명하게 갈린다고도 볼수 있다. 아마도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본적인 이유는 두려움이다. 아마도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일것이다. 항상 생각하듯이 아시아 사회의 공통점이란 긍적적인 부분의 강조가 아닌 부정적인 부분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각 구성원의 마음 깊은 곳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자리잡고 있다. 교육관의 차이일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북아메리카-유럽 공동체와 무엇이 다르리랴. 어느 누구나 불이익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다. 아쉽게도 개개인이 특정 그룹에 속했을때 성취도에 일정정도 비례해서 순차적으로 높아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을 보완하고자 거대한 사회속에 그룹을 만들고 그룹속에 자신을 보호하고 속박하고 시간과 노력을 헌납한다. 각 그룹을 이끌었던, 이끈, 이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고 이것이 고착화 되어간다. 구성원의 본능이 사회구조 패턴과 생존에 관련된 보수를 만들고, 어떤 형태로의 다양한 부분적 보수 구조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해당 그룹 및 다른 그룹에 직간접적으로 갈등을 만든다.
또 문득 생각이 나는 것은, 이러한 구조설정에 의한 사회 갈등의 양상이 마냥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회구조, 커다란 사회구조가 생겨나고 그러한 경향은 줄어들지 않는다. 평등, 평행, 공정을 원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사람은 80세 정도의 수명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 오랜 시간동안 역설적으로 이상적인 삶만을 바라보면서 살지 않는다. 즉 호위호식하고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즉 본인의 기본 욕망을 해소하고 일정 상수에 해당하는 추가적인 행복이 주어진다면 평등, 공정에 대한 관심은 매우 낮아지게 되어있다. 그 어떤 사회적인 참여 장치가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의 본성만을 중시하게 된다면 이러한 가치는 일정수준 높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개인의, 또한 개인이 모인 그룹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생명체와 비유되어 비교될 수 있다. 우월성을 떠나 인간과 개를 비교해보자. 각각의 세포는 지속성과 세포분열을 목적으로 하고 이러한 세포들 또한 그룹을 생성하여 일정 시스템을 만든다. 개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떠나 객관적인 우월성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그렇다면 작은 광주, 남한, 남북한, 아시아, 아시아 퍼시픽 등 다양한 사회의 관점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이렇게 재귀적으로 더 넓은 넓은 사회만을 바라볼 순 없다. 너무나도 이론적이다. 그렇지만 내가 한국이라는 사회의 하나의 세포이고, 이 곳에서 세포로서의 역할을 다 할수 있으며,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내 몸이 강아지로 태어나기 보다는 인간으로 태어나길 원한다. 지금 강아지라면 인간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갔으면 좋겠다. 더욱더 건강한 인간으로.